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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산업의 지형도 / 김영준
이 글은 작가이자 문화연구가인 김영준이 다변화하는 현대 문화예술산업의 지형도와 지역 문화의 나아갈 방향을 짚어낸 칼럼이다. 저자는 대중문화가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고 예술이 거대한 산업이자 재화로 전환된 오늘날, 문화예술 생태계를 읽어낼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류 현상 속에서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제는 권력의 중심부나 자본주의적 시장 가치에만 얽매이지 말고 부산을 비롯한 지역 고유의 문화예술을 주체적으로 성찰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배타적 로컬리티를 벗어난 새로운 접근과 지역 문화예술사에 대한 역사적 보존을 바탕으로, 부산의 예술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고유한 브랜드로 도약하기를 기대하는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볼 수 있다.
1. 새로운 지평의 독도법(讀圖法)
일본 중년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욘사마(배용준) 현상, 엘에이 다저스(LA Dodgers) 스타디움에서 울려 퍼졌던 ‘강남스타일’을 기억하는가? 어쩌면 우리에게 이러한 현상들은 기획하지 않았던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다. 적어도 지금 중년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오히려 일본에 도착한 비틀즈를 보기 위해 공항에 몰려든 일본 젊은이들이 환호하는 사진에 동화되는 것은 낯설지 않았다. 당시 아시아인의 욕망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한때 TV나 영화 매체에서 백인의 등장에 익숙했다. 육백만 불의 사나이나 수퍼맨, 007 주인공의 환영(illusion)이 우리 시각을 지배했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 부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가장 가치 있는 여행은 여행지의 미술관(Museum)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이 말에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미술관 방문’처럼 로컬에서 가장 교양 있는 예술문화를 즐기는 행위를 지시하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문화의 정점에 예술을 위치시키는 것에는 크게 반감이나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교양의 역사는 길지만 그것이 범대중적으로 보편타당한 보통명사가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예컨대 68운동이나 비틀즈의 등장 이전, 이처럼 범 인류에게 동 시간적 이슈는 제2차 세계대전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세계적 이슈에 참여하는 군중의 출현으로‘대중문화’라는 새로운 개념이 파생되었다.
문화의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그 범주를 추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 활동이 문화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문명의 발달과 과정에서 그 또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근대 이후의 문화 양상은 일부 계층에서 범시민, 범대중으로 옮겨왔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 이른바 현대의 문화는 새로운 지평, 새로운 지형을 만들었다. 문화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산업이 되었으며, 엄청난 추상적 상품으로 전환되었다.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을 문화로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형식이 예술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지형과 문화예술의 생태계를 바라보는 데에는 새로운 시각, 때로는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과거의 분류법(taxonomy)이나 지식 체계에서 현대를 특정하는 것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급변하는 세계 문화예술의 판도, 그 지형을 읽어낼 새로운 독도법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경제 패권의 이동이 시대의 문화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중해 라틴 문명에서 신대륙의 발견이 대서양 연안의 국가로, 세계대전 이후 다시 아메리카로 패권 이동했다. 모든 문화의 편재가 미국 중심이 되었고, 오랫동안 미국은 세계 표준을 만들어 왔다. 유럽 중심의 미술사가 19세기 미술에서 멈춘 것처럼 되었고 소위 현대 미술은 미국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어떤 이론가는 이러한 인식 현상을 착시로라고 말한다. 이것이 착시이든 실재이건 우리의 지식 편재와 분류의 표준으로 (한동안)작동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술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의 유일무이한 창작물이라 권력 쥔 사람의 향유물이었다. 그리고 부르주아와 지식인이 그 수요를 물려받았다. 20세기에 들어 60년대 초 뉴욕을 중심으로 팝아트가 나타났다. 그때 팝아트는 실패했다. 말 그대로‘팝(pop, Popular)’이 대상이 되길 원했고, 팝의 소재를 들였다.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의 속내는 여전히 대중과 구별된 엘리트주의자 였다. 모든 문화와 예술의 유통과 인프라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화이트 큐브라는 성지에 특별한 조명 세례를 받고있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통조림에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 모순이 비평도, 미술관도, 학계도 아닌 바로 ‘시장’에서 극복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2. 문화 콘텐츠와 예술, 예술과 산업
한류의 세계 정복기를 살펴보면 뭉클하다. 여전히 진행 중인 한류의 확장은 어디서 멈출지 가늠키 어려울 정도다. 무엇 때문일까? 설명모델은 다양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나라 국력 상승이다. 세계 어디에도 코리아는 뉴스 토픽을 장식하던 불량국가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이념의 시대가 끝난 것처럼, 또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지위를 포기한 것처럼 패권의 중심부가 해체되어 간다. 오르지 못할 빌보드챠트에 우리의 대중음악이 장악하기도 하고 브리튼의 자존심인 축구에서 우리의 스타가 등장한다. 디즈니나 헐리우드 히어로 보다 한국인 소시민의 성장과 욕망에 집중하고, 한글과 한식은 지구촌 어디에서나, 생경하지만 거부감 없이 소비된다. 어떤 단어 앞에‘K’가 들어가면 어디서든 문화가가 되고 즐거운 콘텐츠가 된다. 필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소위 만화는 명화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쳇말로 각 잡고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캐리커처(caricature)가 그랬고 패러디(parody)도 그랬다. 20세기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Fox Lichtenstein)이 자신의 회화 작업에 만화를 도입했다. 대중잡지에 한낱 가십거리를 주제로 다루었던 눈요기에서 이제 미술관 전시실이나 수장고에 모셔질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 언뜻 생각난 것이 있다. 최근 영국 이피엘(EPL)에서 10년을 뛴 우리의 축구 스타 손흥민이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MLS) 엘에이에프씨(LAFC)로 이적했다. 첫 데뷔전에서 멋진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을 때 팀 동료의 인터뷰 중 손흥민의 골 장면은 루브르에 전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냥 스쳐 지나갈 한 사람의 코멘트지만 루브르의 전통적 상징성과 축구의 문화적 파급 능력 그리고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각이다.
신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손흥민의 축구 실력이나 명장면 외에 그의 상업적 가치가 뉴스 미디어 매체를 연일 채우고 있다. 만화가는 연예인 스타가 되었으며 그의 그림은 감상의 대상이 되었고 시장의 고급 매물이 되었다. 가수는 기획사에서 만들어지고 시장에 내어놓는 상품 가치로 평가받는다. 이제 모든 문화와 예술이 재화(財貨)가 되어 대중의 시장에서 유통된다. 이제는 산업이다.
예술의 재화가 대중문화 속에서 산업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진짜 착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예술의 전통성, 과거의 산물, 전승되는 습속이 그 유효기간을 다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위 올드 패션은 케케묵은 낡은 것, 쓸모없어졌거나 가치가 상실된 것이 아니다.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의 호랑이 더피(Derpy)는 평소에 우리의 관심에서 저 멀리 있었던 우리 전통의 해치(해태)에서 온 것이다. 그가 지금 대중의 감각으로 캐릭터화 되었을 때, 단순히 영화 이미지나 미니어처 인형으로만 소비되는 것뿐 아니라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산업 재화로 재가공된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닐까?
3. 지역 문화 예술의 좌표 그리고 부산
중심의 해체, 패권의 파편화, 신자본주의 등 복잡한 개념들이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혼란과 불편함을 준다. 수많은 개념이 파생되고, 또 그러할 필요성도 있겠지만 우리가 문화와 예술을 얘기할 때 현상의 분석, 이론, 많은 개념에서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의도치 않게 들리는 음악이나 이미지에 호감이 가고, 예쁜 팬시를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이 콘서트장이나 미술관에 가는 것 보다 가치 없는 문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개인의 감성이 공동체 언어에서 해방되어 간다. 거대 담론에서 소 담론으로, 군중의 가치관에서 개인의 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편, ‘지역의 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같은 담론은 마치 학술 대회에서나 나올법한 논제로 생각한다.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는 얘기지만 ‘서울을 욕망하는 부산미술’과 같은 담론이 여전히 계속된다는 것에는 해결할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인프라의 중앙집중이라든가 수요 대비 공급의 문제 등 수 차례 원인 분석과 처방전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지방 붕괴’의 시대에서 불모지 운운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의 시선은 소위 ‘선진지역’이나 ‘권력 중심지’가 아닌 곳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대상으로 놓고 성찰해 본 적은 있는가? 우리의 로컬이 어떻게 생겼던지 간에 우리의 품이고 또 우리가 안고 가야 할 공간이지 않는가?
해체, 패권, 자본 등의 추상적 문제에 선행해 지금 우리 지역의 어떤 문화가 있는지, 어떤 예술가, 어떤 문화 생산자가 있는지를 둘러보아야 한다. 지역에도 시간의 흐름은 있었고 그 흔적은 남아있다. 우리는 우리 지역의 역사를 살피고 흔적을 보존해야 한다. 지역 문화는 바야흐로 ‘로컬 트랜드’라는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잠재적 재화이다. 부산의 문화예술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기 위해 몇 가지 제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선 지역 문화를 배타적 개념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컬리티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치적 문법이나 행적 구역으로써의 인식을 넘어서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두 번째는 재화 가치를 단순히 시장 가격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미술 시장을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은 여전히 예술의 언어에서 작동하는 것이며, 예술에 대한 감성은 제품에 대한 일반적 재화 심리와는 다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부여해 왔던 예술의 가치판단은 미학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또는 그 어떤 이론적 방법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의 기능이 지금 활성화되지 못한다고 해서 시장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우리 지역의 문화 예술적 행위의 시대적 흔적은 화석처럼 침식 되어있다. 지역 문화예술사의 기술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 관점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미술관의 업무적 성격에만 미루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많은 제도와 그 기능들이 현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재편제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오픈 수장고(공공 수장고)가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할 필요성이다. 또 이 모든 담론의 체계화를 위해서 학교가 할 수 없는(하지 못하고 있는) 지역 문화예술 연구이다. 유능한 연구원들에게 연구 모멘텀이 되는 연구 기제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제시들에도 많은 선결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지역의 문화예술 향유가 누구에게나 원하는 트랜디한 것, 지역의 특수성이 문화적으로 소비되고 교양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은 지금,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 주변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 모든 사람이 부산의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흠모하는 시간은 곧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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